우리동 명소/문화소개

동미타사

미타사

옥수동 종남산(현 달맞이봉)아래 오래된 사찰로서 예전에는 두뭇개 승방이라 불리었으며, 서울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여승방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미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교구인 조계사의 직할사찰로 봉은사 등과 함께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보호되는 전통사찰 중 하나이다.

미타사(彌陀寺)는 보문동의 탑골승방, 숭인동 청룡사의 새절승방, 석관동 청량사와 함께 성종 대 이후 서울 한양도성 밖의 4대 비구니 사찰 중 하나이다. 미타사는 888년(신라 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부근에 대원 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창건되었으며, 1115년(고려 예종 10년) 봉적, 만보 두 비구니 스님이 현재의 옥수동으로 옮겨 극락전을 건립하고 아미타불을 모신 후, 담진 국사로부터 ‘미타사’라는 사명을 받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888년(진성여왕 2)대원(大願)이 창건하였으며, 1115년(예종 10)에 봉적(奉寂)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지금의 금호동 골짜기에서 종남산(終南山)으로 절을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1824년(순조 4)대원(大願)이 무량수전을 짓다가 3년만에 입적하자, 그의 상좌 환신(幻信)이 뒤를 이어 1827년에 완공하였다. 1862년(철종 13)인허(印虛)가 화주가 되어 조대비(趙大妃)의 하사금과 조진관(趙鎭寬)의 부지 기부로 극락전을 다시 짓고 요사를 수리하였다.1873년(고종 10) 비구니 성흔(性欣)이 불전과 요사를 고쳤으며, 1928년에는 선담(仙曇)이 7층 석탑을 세웠다. 1933년에는 주지 돈형과 화주 이경화(李京華), 전경각 등이 산신각을 중수하였고, 1938년에는 화주 안성훈(安性勳) 등이 무량수전을 중수하였다.부속 암자로는 대승암과 칠성암, 금보암·금수암·정수암·용운암·관음암·토굴암 등 8개가 있다. 사세가 번성할 당시에는 모두 9동 66칸의 건물이 있었다.유물로는 1883년(고종 20)에 조성된 칠성탱화를 비롯하여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화와 현왕탱화, 감로왕탱화·신중탱화·지장탱화, 1900년(광무 4)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화와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쌍호정터

쌍호정터

옥정초등학교 부근 295번지에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집터가 있었다. 조선후기 익종의 비(妃)이며 현종의 어머니가 되는 선정왕후 조대비가 태어날 때 호랑이 두 마리가 정자 앞뒤문을 지키고 이었다고 해서 쌍호정 (雙虎亭)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생가의 규모는 대단히 커서 1958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그 자리는 지금의 삼성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조대비(1808~1890)는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로서 흥선군의 둘째아들을 고종으로 맞이하게한 풍운의 여걸이었다.

독서당터

독서당터

옥수동은 예전부터 전통적인 교육촌이기도 했다. 1426년 세종 때에 총망받는 청년문사들로 하여금 글을 읽도록 하기위해 사가독서제라 하여 각종 독서제도를 장려하였고 시간이 흘러 별도의 건물을 지어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중종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이때부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소각될 때까지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동호독서당은 복구되지 못하였다. 중종(1488-1544)은 19세(1506)에 등극하여 연산군의 폐정으로 문란해진 정국을 바로 세우는데 역점을 두고 성종이 추구하였던 성리학을 이룩하고자 사림을 다시 등용하는 등 유교정치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제일 먼저 연산군이 혁파한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시작하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실시하였다. 사가독서의 자격은 홍문관의 관원 중에 젊고 총명한 자에게 주어졌다. 사가독서의 숫자는 1회에 4명에서 12명이었으며, 독서기간은 보통 6개월 이상이었으나 중종 12년 7월에 홍문관 정자 안처순安處順이 6개월씩 교대하는 것은 본사의 업무를 보지 않는 폐단이 있다는 건의에 따라 3개월로 바뀌게 되었다(朝鮮王朝實錄. 中宗 12年 7月 丁亥. 卷28. p.289下右). 당시 독서당에는 12명의 직원이 2조로 나누어 숙직하였으며, 한 달에 쌀 15섬, 콩 15섬과 내섬시內贍寺에서는 날마다 술 1병과 소금, 간장, 채소, 땔감 등을 제공하고, 장악원에서는 잔치를 베풀었으며, 중종은 술과 선도배仙桃杯를 주면서 독서를 권장하였다. 독서의 장소로는 중종 1년(1506)12월에 용산의 폐사에서 정업원(현 숭인동 청용사부근)으로 옮겼으나 정업원이 한양 내에 있기 때문에 사가독서자들이 자주 집에 왕래하고 친우들이 방문하여 독서에 전념할 수 없다는 연유로 별도의 독서당설립 계획이 수립되었다. 중종은 1511년 1월 19일 두모포 월송암 부근에 독서당 신축을 승낙하고, 또한 그 해 4월 2일 용산 독서당을 개조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모두 국내외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종 9년(1514)까지 정업원을 계속해서 독서당으로 사용하다가 중종 10년(1515)에야 비로소 동호東湖의 월송암 서쪽 기슭에 독서당을 착공하기 시작하여 중종 12년(1517)에 완공하고 이를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 동호는 두모포를 일컫는데, 1750년대의 서울지도인 도성도都城圖와 경도오부도京都五部圖, 1800년대의 수선전도首善全圖를 보면 아래에는 한강물이 흐르고 두모포豆毛浦 위쪽으로 응봉鷹峰과 부아현負兒峴사이에 독서당讀書堂이라 표기되어 있다. 현재 성동구 옥수동 매봉산 부근을 말한다. 그 규모를 보면, 김안로金安老 ;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한강 북쪽 기슭에 자리한 동호당은 규모가 남호당보다 넓고 꾸밈도 더 화려하며, 또한 국가에서 제공하는 식량 및 공급물도 더 많고 훌륭하다. 그래서 모두가 독서에 열중하였으므로 독서당은 항상 빈집처럼 조용하였다.”고 했다. 명종 7년에 동편에 건물 한 채를 증축하여 사용하였다. 그 배경을 보면 심수경沈守慶 ; 1516-1599의 <유한잡록遺閑雜錄>에 “동호당은 처음에 대청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쪽으로 침실이 있었는데, 명종 7년(1552)에 임당 정유길(1515-1588), 낙촌 박충원(1507-1581), 국간 윤현, 동원 김귀영(1519-1593), 청천당 심수경(1516-1599) 등의 건의로 누각 동쪽에 집 한 채를 짓고 ‘문회당文會堂’이라 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명종시대의 사가독서는 불교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면을 보였다고 하겠다. 이 때 실시되었던 사가독서는 선조에 이어져 임진란 전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 사료로는 독서당계회도, 도성도, 한양도, 동국여도, 사산금표도 등에 그 위치 및 규모가 전하고 있다

독서당원은 세종부터 영조까지 48회 320명이 배출되었고 정조의 규장각 설치로 폐지되었다. 독서당터의 비석 2기 관련, 일제시기에도 두모방 즉 옥수동 인근의 유림들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2기를 민간에서 기증을 받아 2018년 5월 독서당터에 이설하게 되었다. 왼쪽 1기는 공부자선성묘임원기념비(1925년 이후 건립 추정)이고 오른쪽 공부자도통고금연원기념비(1923년 건립 추정, 병목정 51번지에 있다가 이전한 것으로 추정됨)이다. 왼쪽을 보면 창립약장이 정은채로 되어있고 도유사 정성묵이 나온다. 1923년 7월 30일 동아일보 석간 3면 사회면에 정은채의 한지면 문묘 비각 설립 운동 즉 사설공자묘 또는 사설향교 설립운동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지금의 장충동 인근에 살던 유생 겸 출판 발행인이었다. 그 기사 내용에 병목정에 비각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비각설립을 주도한 단체가 공부자선성묘로 추정된다. 그 단체의 임원진을 1924년 정은채의 사후 정성묵 등이 기념비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이후 건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오른쪽은 공부자고금도통연원기념비로 1917년 정은채가 속수성적도후학록교정소를 설립하여 출판활동과 포장완의문 관련 활동을 한 것이 확인되므로 이와 관련된 유물로 보이지만 설립시기 관련 동아일보가 언급한 1923년 병목정 51번지에 건립했다는 그 비석인지 명확하지 않다. 정은채는 1859년부터 1924년까지 활동한 서사헌정 거주 유생 겸 출판업자이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동아일보 기사에 병목정 51번지에 공자 관련 비각을 건립했고 1924년 정은채의 사후 1925년 1929년 사이에 정성묵이 임원기념비 비석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공부자고금도통연원기념비 비석의 격은 경성선성묘 임원기념비보다 상당히 떨어진다. 옥수동 262-1번지에는 해방후 공부자도통고금연원기념비만 있었지만 무슨 사유인지 병목정 51번지 또는 144번지 또는 서사헌정 131번지 등에 있던 경성선성묘 임원기념비를 옥수동 262-1번지로 옮겨왔고 2018년 5월 극동아파트 자리로 이전한 것이다. 참고로 정은채는 1920년대 창신서관에서 啓蒙篇諺解, 千字文, 幼蒙先習, 古今歷代標題註釋十九史略通攷, 少微家塾點校附音通鑑節要 등을 출판했다. 동아일보 1923년 7월 30일 기사 孔子廟의 私設은 졀대로 허가하지 안는다 시내 서사헌뎡 西四軒町 사십팔번디 유생 뎡은채 鄭殷采 씨는 공부자를 연구하는 독학자로서 성적도속수聖蹟圖續修오륜행실五倫行實을 출판한 일도 잇는대 씨는 공부자를 존경하는 뜻으로 공자묘孔子廟와 비각碑閣을 세울 계획으로 병목뎡 竝木町 오십일번디에 임의 비각을 세우고 비석을 삭이는 중인 바 돌연히 경긔도에서 공부자에 관한 일은 전부 경학원에서 맛하 하는 일임으로 개인에게 그 가튼 일을 식힐 수 업다 내명이 잇서서 모처럼 계획한 일은 허사에 도라갓는대 씨는 다만 자긔 개인의 경영과 개인으로 존경하는 뜻으로 이 가튼 일을 하고자 하야 임의 고양군 한지면 高陽郡 漢芝面에서도 묘각을 세우랴다가 당국의 금지로 못한 일도 잇섯다더라
두무개 나루터

두무개 나루터

옥수동의 옛이름인 두뭇개, 두물개는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되는 지점이라 붙은 명칭인데 한강을 끼고 산들이 병풍처름 둘러쌓여 있어 서울 근교에서는 드물게 수려한 고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옥수동 앞 한강이 호수처름 잔잔하다 해서 동호(東湖)라 불리었는데 이는 용산의 남호, 마포의 서호와 함께 도성의 한강변 동. 남. 서쪽 세곳에 있는 경관 아름다운 강호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이곳의 포구를 두무포(한성부 남부 두모방 수철리계에 위치)라 불리었으며 지금의 달맞이봉 아래가 되겠으며 옥수역 앞 어울마당 공원에 표지석이 있었다가 서울시의 위치 고증에 따라 2021년 금호육갑문 인근으로 이전되었다. 두모포는 영조 때 어제수성윤음에 의거 1751년 두모방이 설치될 때 현재 옥수동 즉 두모방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두모방에는 두모포계(豆毛浦契, 옥수동 일대)·신당리계(神堂里契)·전관계(箭串契, 성수동·능동·면목동 일대)·신촌리계(新村里契, 행당·응봉동 일대)·수철리계(水鐵里契, 금호동 일대)·중촌리계(中村里契, 성수 및 화양동 일대)가 있었다.

두모포는 일제가 1910년부터 경원선 건설을 하면서 제방을 쌓아서 한강변이 원형을 잃는 과정에서 원형이 사라졌다. 두모포 앞에는 저자도라 하여 70년대초 강남 재개발로 준설되기 전까지는 길이 60리가 넘는 백사장인 삼각주가 있었다.

동빙고터

동빙고터

옥수동 8번지 현대아파트 자리에는 얼음을 보관하던 동빙고(東氷庫)가 있어 빙곳골, 빙고동이라 불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빙고의 중요성은 자뭇 커서 겨울에 강물이 두껍게 얼었을 때 제빙하여 보관하였다가 종묘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

빙고안에 있는 얼음은 인근 저자도에서 갈대를 베어다 얼음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싸서 녹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옥수동 현대아파트 입구에 표지석만 있다. 빙고는 나라의 제사 등에 쓰이던 얼음을 저장하고 출납하는 것을 관장하던 관아로, 동빙고의 얼음은 종묘와 사직단 등의 제사에 쓰게 하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궐이나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 태조 5년(1396년) 둔지산 밑에 서빙고를 세우고 두모포에 동빙고를 세웠다.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했지만, 동빙고동은 서빙고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일 뿐 빙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제로 동빙고는 한강 연안 두모포, 지금의 옥수동(현대아파트와 미타사 입구 주변)에 해당하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빙곳골','핑곳골'로 불렀었다. 이는 마을 입구에 석빙고가 있었음에서 유래되었을 터이다. 이를 예조의 속아문에서 관장하였고 광무 2년(1898년)에 양빙고가 폐지될 때까지 500년 가까이 운영되었다. 동빙고에는 얼음 1만244정(丁), 서빙고에 13만4,974정을 보관했으므로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3배 이상의 얼음을 저장했다. 실제로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던 것에 비해 서빙고는 8동이었다. 동빙고는 연산군 10년 서빙고의 동쪽(오늘날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옮겨졌다.궁궐 안에는 별도로 내빙고를 두어 궁궐의 얼음 수요를 맡았다. 얼음의 보관과 반출은 종6품인 빙고에서 관장했으며 제향에 올리는 얼음은 봉상시에서 맡았다. 동빙고는 음력 3월 1일부터 가을 상강(霜降)까지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공급했으며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의 왕래가 많았던 한강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사빙고가 존재했었다. 조선 단종 2년(1454년)에 사헌부에서는 '국가의 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므로 정1품에서 종4품의 대부(大父) 이상과 각사(各司)에서 얼음을 보관할 수 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얼음의 저장과 반출은 엄격히 규제됐다. 만약 얼음의 보관을 소홀히 하여 저장한 얼음이 녹아 없어지면 파면시키는 등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성종 17년(1488) 12월, 날씨가 따뜻해 얼음이 얼지 않자 홍문관에 명해 동빙고의 북쪽에 있었던 사한단(司寒壇)-현 옥수동 산1번지에서 얼음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기한제(祈寒祭)를 지내게 했고 영조 45년(1769) 12월에는 기한제를 지낸 후 날씨가 추워져 얼음을 채취할 수 있었다고 제관이 상을 받기도 하였다. 성종 24년(1493)에는 군관들이 술을 마시고 얼음 저장하는 일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는 바람에 얼음이 녹아 물이 창고 밖으로 새어나왔다. 이에 성종이 크게 노해 관원 전원을 파직시켰다. 이듬해에는 관원들이 정성 들여 얼음을 관리했기 때문에 연산군 1년(1495) 성종의 대상(大喪)과 명나라 사신의 접대에 쓰고도 가을까지 남아돌았다고 한다. 얼음의 채취와 보관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겨울이 춥지 않아 채취가 불가능하였고 때로는 보관상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많은 얼음을 겨울에 채취하여 봄부터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겨울에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 5년(1423) 11월 장빙군에게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하사했고 세조 13년(1467) 11월에는 환관과 선전관을 동서빙고에 보내 군인 가운데 동상이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게 한 것을 보면 국가에서 빙고 제도에 각별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석빙고는 중국의 『시경』에 능음(凌陰)이라 하여 '음을 저장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고 우리나라의 빙고도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례왕(24∼57년)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도 지증왕 6년(505)에 '시명소사장빙(始命所司藏氷)'이라는 기록이 있다. 석빙고는 온도의 변화가 작은 반지하의 공간 위로 돌을 반구형으로 쌓고, 흙으로 덮어 만든 창고입니다. 돌 사이를 철물로 단단히 메우고 단열성이 높은 흙을 덮었기 때문에 빙고 내부의 온도가 얼음의 온도(0도)를 유지한다. 석빙고를 위에서 살펴보면 굴뚝처럼 생긴 환기구가 3-5개 있다. 더운 공기는 찬 공기를 만나면, 위로 떠오르는 성질이 있다. 여름에 문을 열었을 때 들어온 더운 공기는 바닥에 가라앉지 않고 천장 쪽으로 올라가 환기구를 통해 빠져나갔기 때문에 여름에도 어름을 보관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비법은 얼음을 보관할 때 종이에 싸서 차곡차곡 쌓은 다음 그 위에 짚이나 왕겨를 덮어두었다. 얼음을 종이 싸 두면 싸지 않았을 때보다 저장 기간이 4-5배 정도 길어진다, 그 이유는 얼음은 녹으면서 주위의 열을 빼앗는 성질이 있는데 얼음을 종이에 싸 두면 얼음이 녹으면서 종이로부터 열을 빼앗아 얼음의 온도가 낮아지면서 다시 얼게 되는 것이다.

사한단터

사한단터

동빙고의 북쪽 옥수동 산 1번지에 돌로쌓아 만든 사한단이 있었다.

사한단(司寒壇)은 얼음을 잘 얼게 해 달라고 매년 춘분일에 얼음을 꺼낼 때와 겨울 상순에 얼음을 저장할 때 물과 비를 다스리는 신(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인데 지금은 현대아파트 입구 빙고터 표지석 옆에 표지석만 있다.

매봉산 시비

매봉산 시비

국문학자이자 한글운동가인 오동춘 시인이 매봉산에 올랐을때 정답고 기쁜 마음과 건강한 신체를 표현한 시로서 1992년 옥수동 매봉산 산악회에서 설립 기증한 시비이며 현재 매봉산 정상(171m) 팔각정 아래에 있다.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옥수동
  •  담당자 우현진
  • 전화번호 02-2286-7402
  • 최종수정일 2022.06.19